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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민트의 상냥한 블로그

2023 별서명승 22곳 본문

조경/Study

2023 별서명승 22곳

상냥한 민트 2023. 11. 30. 17:23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ViewList.do?gbn=2&pageNo=1_1_2_0&culPageNo=1&ccbaCndt=&searchCondition=&region=1&s_kdcdArr=15&s_ctcdArr=00&ccbaPcd1Arr=99&stCcbaAsdt=&endCcbaAsdt=&ccbaGcodeArr=00&sortType=&sortOrd=

01 명승 제19호 예천 선몽대 일원

02 명승 제25호 순천 초연정 원림

03 명승 제26호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淸溪) 김진(金璡, 1500~1580)으로부터 땅을 받아 세운 정자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전적 등 다수의 보물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정약용의 「택리지 발문」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虛舟山府君水畵帖/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 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개호송(開湖松) 숲'은 통례공 만근(通禮公 萬謹)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년(160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운천 김용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한 숲이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이 숲을 보호해 왔다고 전한다.

이 숲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 숲이며, 완만한 모래사장에 달빛이 비추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 혹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김하는 ‘와우형(臥牛形)’으로 알려져 있는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하여 온 오랜 역사의 마을 숲이다.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은 강 건너편 백운정과 반변천 수중에 조성되어 있는 반월형 섬 위의 소나무 숲인 개호송 숲, 강가를 따라 조성된 내앞마을, 반변천과 강가의 기암과 단애, 천변 숲이 한 눈에 펼쳐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씨족 촌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04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

05 명승 제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06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

07 명승 제51호 예천 초간정 원림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오랜 관직생활과 당쟁에서 벗어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 15년(1582) 창건한 정자로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림 사이의 암석 위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고 아들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인조 4년(1626) 중수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불에 타 그대로 두었다가 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여러 후손들에게 부탁해 영조 16년(1740) 중수를 도모하였고 영조 17년(1741) 기존의 터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사림의 은일(隱逸)생활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바탕으로 하는 선조들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명승지로 바위를 휘돌아 흐르는 계류가 시원한 운치를 자아내는 등 경관적 가치가 크다.

08 명승 제52호 구미 채미정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에 선산부사(善山府使) 민백종(閔百宗, 1712~1781)이 현지 유림(儒林)들과 의논하여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정원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09 명승 제53호 거창 수승대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수승대’ 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이다.

10 명승 제57호 담양 식영정 일원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15년(1560)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정자를 짓고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정자이다.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식영정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11 명승 제118호 서울 성북동 별서
1) 지정가치

(역사성·학술성) 별서 조성 이전에도 경승지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고종 대의 내관인 황윤명이 조성하여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난처로 사용된 곳임.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서 보존ㆍ연구의 가치가 있음

(경관성) 자연 계류와 지형, 암석 등이 잘 어우러져 공간구성 및 경관연출 등의 측면에서 한국전통 정원으로서의 미학이 살아있음

2) 현황

서울 지역에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정원으로서, 전통 정원 요소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경관적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명승이다.

시냇물을 따라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는데, 앞뜰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있다. 안뜰을 감싸주는 용두가산(龍頭假山)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뜰의 영벽지(影碧池) 주위에는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장외가(檣外家), 청산일조(靑山壹條) 등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고 바깥뜰의 고엽약수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경관을 보이고 있다.

별서를 만들기 전부터 오랫동안 경승지로 이용되어왔던 곳이며,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춘파(春波)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한 별서이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별궁으로 사용한 역사적 가치도 있다.

 


12 담양 명옥헌 원림

명옥헌(鳴玉軒)은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가 은거했던 망재(忘齋) 인근에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조성한 별서로 정자 뒤에 있는 샘물이 울타리를 따라 졸졸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히고 흩어지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 명명하였다.

이후 영조 25년(1748) 오이정의 손자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이 현감 재직 시절 퇴락한 명옥헌을 중수하였다.

담양 명옥헌 원림은 주위의 산수가 연못에 비치는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곳으로, 자연을 향유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잘 반영된 원림이자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이다.

담양 명옥헌 전경
명옥헌 원림 연못 전경


13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청암정(靑巖亭)은 중종 21년(1526)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주변에 물을 두르고 돌다리를 놓아 섬과 같은 모습으로 조성하였으며, 석천정(石泉亭)은 권벌의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유곡(酉谷)마을 주변 경관이 빼어난 석천계곡에 지은 것이다.

유곡마을은 권벌이 중종 15년(1520) 터를 잡은 곳으로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로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 청암정과 그 일대의 유곡마을을 시냇가의 대표적 주거지로 평가한 바 있다.

청암정과 석천계곡 일대는 마을의 대표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 계류, 아름다운 수석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이다.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_천하동천 글씨 (촬영년도 : 2015년)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_석천정사와 석천계곡3 (촬영년도 : 2015년)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_석천정사와 석천계곡2 (촬영년도 : 2015년)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_석천정사와 석천계곡1 (촬영년도 : 2015년)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14 진도 운림산방
진도 운림산방은 넓고 울창한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천연기념물)이 있는 첨찰산과 남도전통회화의 산실로 유명한 명소인 운림산방 등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곳으로 역사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운림산방은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조성하여 말년에 거처하면서 창작과 저술 활동을 하던 곳으로서「소치실록」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仙境)으로 꾸민 곳이다.

 

진도 운림산방
진도 운림산방 가을전경
정원 중앙에서본 운림산방 전경 (가을)
정원 중앙에서본 운림산방 전경
정원 중앙에서본 운림산방 전경
정원 중앙에서본 운림산방 전경


15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
용계정(경북 유형문화재)은 1546년에 건립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북평사를 지낸 정문부가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정자원림을 경영해 왔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이다.

마을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덕동숲과 자연계류(연어대, 합류대, 와룡담) 등이 잘 어우러진 역사문화 경승지이다.

* 조선 중기 여강이씨의 집성촌으로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덕동(德洞)’이라 불림.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출입문 (촬영년도 : 2015년)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용계정 원경 (촬영년도 : 2015년)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연못 (촬영년도 : 2015년)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문틈으로 바라본 용계정 (촬영년도 : 2015년)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덕동숲3 (촬영년도 : 2015년)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_덕동숲2 (촬영년도 : 2015년)


16 안동 만휴정 원림
만휴정(晩休亭)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은거하며 경영한 쌍청헌(雙淸軒) 터에 위치한 정자로, 영조 46년(1770) 동도(東道) 김덕일(金德一, 1734∼1794)이 중수하였다.
안동 만휴정 원림은 만휴정과 정자 주변 계곡, 폭포 등의 산림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명승이다.

 

안동 만휴정 원림1_2019년 촬영(출처 : 문화재청 대변인실)

 

안동 만휴정 원림2_2019년 촬영(출처 : 문화재청 대변인실)

 

안동 만휴정 원림_5 (촬영년도 : 2015년)

 

안동 만휴정 원림_4 (촬영년도 : 2015년)

 

안동 만휴정 원림_3 (촬영년도 : 2015년)

 

안동 만휴정 원림_2 (촬영년도 : 2015년)

 


17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거연정(居然亭)은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은거했던 곳 서쪽에 그의 후손인 전재택(全在澤) 등이 고종 9년(1872)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이다.
거연(居然)은 주자(朱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취한 말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정사를 짓고 거처하여 주변의 명승을 소유하였음을 의미한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거연정기(居然亭記)」에서 “대개 영남의 승경 가운데 삼동(三洞: 안의삼동)이 최고이고, 삼동의 승경 가운데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며, 화림동의 승경 가운데 이 정자가 최고이다.”라고 하여 거연정의 경관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은 주변의 기묘한 화강암 반석, 폭이 넓은 골짜기, 흐르는 계곡물과 조화를 이루는 등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이다.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촬영년도 : 2015년)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_안개낀 거연정2 (촬영년도 : 2015년)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_안개낀 거연정1 (촬영년도 : 2015년)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_아래에서 올려본 거연정 (촬영년도 : 2015년)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_건너편에서 바라본 거연정 (촬영년도 : 2015년)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_4 (촬영년도 : 2015년)

 


18 밀양 월연대 일원
밀양 월연대(月淵臺) 일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관직에서 물러나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조성한 데서 유래한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숙종 23년(1697) 쌍경당(雙鏡堂)을 중수하고, 고종 3년(1866) 이태의 11대손 이종술(李鍾述)이 월연대를 중수하였다.
밀양 월연대 일원은 월연정에서 바라 본 강변의 풍경이 빼어나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월연대 12경 등 다양한 문화경관적 요소를 지닌 명승지이다.

 

월연대 일원 (가을)
월연대 (가을)
다리건너에서 본 월연대의여름
밑에서바라본 월연대
밑에서 올려다본 월연대 우측면
밀양 월연대 일원
밀양 월연대 일원 (여름)


19 거창 용암정 일원
용암정(龍巖亭)은 순조 원년(1801)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용암 위에 세운 정자로, 고종 원년(1864) 증손 임수학(林秀學)이 중수하였다.
지금의 월성계곡에 해당하는 위천을 따라 독특한 형상의 바위들을 정원 요소로 삼고, 주변의 수려한 경치를 한데 모은 명승으로 이를 노래한 임석형의 용암팔경 시가 전하고,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은 안의삼동(安義三洞)의 원학동(猿鶴洞) 가운데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수승대와 함께 용암정 일원을 꼽았다.
* 용암팔경(龍巖八景): 성령명월(城嶺明月), 금원청풍(金猿晴爐), 위천야우(渭川夜雨), 농산모연(農山暮煙), 덕유효하(德裕曉霞), 종산부운(鍾山浮雲), 석문노송(石門老松) 황강조일(黃崗朝日)

 

계곡에서 올려다본 용암정의 가을
가을 용암정 일대와 계곡전경
계곡 건너서본 용암정 일대의 가을
용암정일대의 여름계곡전경
계곡에서 올려다본 용암정의 여름

 

거창 용암정 일원

 


20 화순 임대정 원림
임대정(臨對亭)은 16세기 후반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가 조성한 고반원(考槃園)의 수륜대(垂綸臺) 옛 터에 철종 13년(1862)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 건립한 정자이다.
‘임대(臨對)’라는 명칭은 송나라 시인 증극(曾極, 1019∼1083)이 지은 시 「염계(濂溪)」의 ‘새벽 물가에서 여산을 마주하네(終朝臨水對廬山)’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임대정은 본래 한 칸의 초정(草亭)으로 지어졌으나 시간이 지나 허물어졌고, 민주현의 손자 민대호(閔大鎬, 1860~1932) 등이 1922년 정자를 중수하면서 2칸을 더 짓고 기와를 올려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화순 임대정 원림은 암반 위에 지은 정자와 상지(上池), 하지(下池), 방지(方池) 3개의 연못 등 원림 요소가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진 명승지이다.

 

 


21 광주 환벽당 일원
광주 환벽당(環碧堂)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부친 김후(金珝)의 정자를 중수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 주변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고,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은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렸다.
증암천 주변에는 송강 정철과 사촌 김윤제가 처음 만난 곳이라 전해지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위치하고 있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식영정(息影亭)을 건립하고 3년이 지난 명종 18년(1563) 식영정 시에 차운(次韻)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 하였고,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계곡에 세 곳의 명승(一洞之三勝)으로 꼽았다.
환벽당은 푸름이 둥근 고리처럼 정자를 둘러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고, 당대 명사들이 드나들며 자연경관을 찬미하며 풍류를 즐긴 시문과 가사 작품이 전하고 있어 사림 문화의 중심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정자이다.

 


22 강진 백운동 원림
강진 백운동 원림은 예로부터 이름난 경승지로 1678년 이전 이담로(李聃老, 1627~)가 조성한 별서이다.
백운동 원림은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특히 『백운첩(白雲帖)』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백운동 12경’ 시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월출산을 배경으로 원림을 조영한 문헌자료가 다수 확인되고, 유상곡수 시설 도입과 수목 식재 등 경관처리기법이 우수하며, 백운동 12경의 구성요소가 잘 남아 있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문인들이 원림의 경관을 예찬한 옛 시문과 그림들이 현재까지 잘 남아 있어 조경사적(造景史的) 가치가 탁월하며, 이담로의 6대손인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정약용,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차를 만들고 즐긴 기록 등이 남아 있어 국내 차 문화의 산실로서 가치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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